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문단 편집) === 전간기 === 1919년 7월,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왕국 국무섭정으로서 핀란드 공화국으로의 국체 전환에 서명하고 신헌법을 승인했다. 그리고 곧이어 초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상대는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결과는 143대 50으로 스톨베리가 당선되었다. 만네르헤임이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은 그가 내전기 좌익학살의 주범 내지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내전 직전 민주적으로 단독과반을 획득한 강력한 지지기반을 가진 당이었다. 즉, 살아있는 국민 중 절반이 만네르헤임이 죽여버린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학살한 만네르헤임에게 분노했지만 내전에서 적군으로 가담한 좌파들은 선거에 나갈 수 없었고, 그래서 그나마 우파 중 가장 진보적인 스톨베리에게 표를 몽땅 몰아주었던 것이다. 만네르헤임을 지지한 것은 군주주의파인 핀란드당 및 청년 핀란드당 제비파, 그리고 스웨덴계 민족주의 정당인 스웨덴인당 뿐이었다. 스톨베리는 [[1906년]]의 의회개혁, 즉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완전한 참정권을 준 그 개혁의 안을 정초한 헌법학자였다. 내전 직후 국체 문제로 청년 핀란드당이 분당될 때 그는 공화주의자들을 참새파로 규합해 스빈후부드 등 제비파와 맞섰다. 1917년 핀란드가 독립하면서 새로 쓰게 된 헌법도 거의 그가 정초했다. 스톨베리는 매사에 자신이 초대 대통령으로서 후대의 전범이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처신했다. 이원집정부제 대통령으로서 총리에게 간섭하지 않았으며, 내전기 적군 가담자들도 국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온건한 사회경제적 개혁을 하고, 1920년에는 적군 가담자 거의 대부분을 사면했다. 이 때 군부의 강경한 비판이 있었지만 스톨베리는 사면을 강행했다. 하지만 이 사면으로 인해 내전기 전쟁범죄의 잘잘못을 따질 필요성이 흐려져 만네르헤임의 혐의도 조용히 묻혀가게 되었다. [[1922년]]에는 스톨베리의 중도적 정책에 신물이 난 군부 내 스웨덴계 사조직의 지령을 받은 백색 테러리스트가 스톨베리의 측근인 내무장관 [[헤이키 리타부오리]]를 자택 앞에서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라푸아 운동]]을 일으키는 등의 행위들로 전간기 내내 [[핀란드]]를 괴롭힌 [[극우]]의 부상의 전조와도 같은 사건이었다. 1930년 7월, 자생적 파시즘 운동인 라푸아 운동이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처럼 [[헬싱키]]로 진군하여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킬 것을 정부에 요구해 관철시켰다. 같은 해 10월에는 이제 전직 대통령이 된 스톨베리와 그 아내가 이 파시스트들에게 납치당해 소련 국경까지 끌려갔다가(두들겨 팬 뒤 시체를 소련 국경 너머에 갖다 버리려고 끌고갔다) 겨우 구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전직 대통령 같은 요인이 피습을 당할 정도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만네르헤임은 대통령 선거에 낙선한 이래 정치에 관심을 끊었다. 그는 헬싱키 은행 감사회장, [[노키아]] 이사회 중역 등 기업 지분들을 가지고 배당금을 받아 살며 전세계에 수렵여행을 다녔으며, 한편으로 핀란드 [[적십자]] 총재를 역임하고 만네르헤임 아동복지협회(Mannerheimin Lastensuojeluliitto)를 창설하는 등 유유자적하고 비정치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가 정치에 관심을 끊은 이유는 정당정치나 민주주의를 불신했기 때문인데, 이는 2차대전 이후 독재자들의 논리마냥 "핀란드는 아직 후진국이라 민주주의가 맞지 않는다"라는 생각과는 다르다. 만네르헤임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불신하여, 전세계 어디에서든 제대로 된 지도자를 세울 수 있는 제도인지 의문시했다. 그가 보기에는 자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정치꾼들에 의해 국익이 침해당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공화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평민들 놀음에 끼고 싶지 않았기에 대통령 낙선에도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1929년]]에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만네르헤임을 찾아가 군사독재자가 되어달라고 하였으나 만네르헤임은 이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극우 사상에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1931년]], 제3대 [[대통령]]이 된 스빈후부드가 만네르헤임에게 방위평의회 주석직을 맡기고 전쟁이 일어날 시 육군총사령관으로 삼는다는 서면각서를 주었다. 스빈후부드의 후임 [[대통령]] 퀴외스티 칼리오도 이 각서를 갱신했다. 방위평의회 주석으로서 만네르헤임은 군수공업에 집중했지만 그가 의도한 대로 재무장이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다지 열성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내각과 사이가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사표를 내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